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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세상

인간불신

혜경은 지독한 인간 불신자였다. 혜경과 알고 지낸 지 십 년이 다 되어갈 무렵에도 그렇게 느꼈다. 나는 혜경이 말하는 사람에 내가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혜경이 말할 때 알았다.

 

나 말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절대 모르는 거야.

 

나는 혜경이 그 말을 꺼내는 의도를 종잡을 수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혜경이 나 또한 믿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혜경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친다는 문제가 아니라 혜경은 모든 이들과의 관계에서 불신을 전제로 했다. 흔히 말하는 배신을 누군가 저질렀다고 해도 혜경은 별 반응 없이 관계를 끊었을 것이다. 애초에 혜경은 제 일 외에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혜경은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그리 배우고 싶은 성품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다만 혜경은 공백기가 있다 하더라도 연락하면 받아주었다. 그것이 혜경과 관계가 유지된 이유였다. 혜경은 연락이 뜸한 사람에게서 전화가 와도 곧잘 받아서 언제 전화를 하든 메시지를 보내든 상관없었다. 혜경은 타인 같은 친구였다. 옆에 한 명쯤은 둘만 하면서 가까운 사람에게는 말하기 힘들어도 생판 남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 다른 이들에게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했다. 나와 혜경 사이에는 묘한 심리적인 거리감이 존재했는데 거기에 십년지기라는 이유가 붙으니 마음은 멀어도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둘 다 티를 내지 않았지만 혜경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혜경을 본 시간 동안 혜경이 사람을 믿지 않게 된 계기는 없었다. 나에게 혜경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실이 서운하지 않았다. 혜경에게 내가 없어도 그만인 존재이듯이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혜경은 서로에게 속을 풀고 살았다. 내가 아닌 이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은 쓰레기를 버리듯 답답함을 해소해주었다.

 

나 자신을 사랑하라. 숱한 말에서 나는 혜경을 떠올렸다. 나 말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절대 모르는 거야. 혜경은 식당에서 갈비를 먹으며 그 말을 했다. 나는 혜경에게 실없는 소리를 한다며 타박했다.

 

그래, 당연한 거지.

 

혜경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혜경은 불판 위에 굴러다니는 식은 고깃점을 집어먹었다. 나는 직원을 불러 갈비를 더 주문했다. 술을 시키지 않아서 혜경과 나는 맨정신으로 밥을 먹었다.

 

혜경의 말에서 나는 불신의 맥락을 파악했다. 믿음에는 당위성이 없다. 본래 모든 이가 한 몸이 아닌 이상 믿음은 길거리의 돌멩이보다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도덕성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혜경이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본인 외에는 애착이나 관심을 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부류. 그래서 누군가를 크게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회색지대 같은 인종.

 

혜경과 슬픔에 관하여 대화했다. 슬픔이라는 것은 하나의 감정이다. 슬픔은 바다처럼 깊지만 세상같이 거대한 것이 아니라고 혜경은 나에게 알려주었다. 슬픔은 개인적인 감정이다. 혜경의 기억은 유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내세우거나 떠벌리며 자랑할 수 있는 게 없어. 혜경은 생의 모든 판단과 행동을 후회했다. 혜경에게 과거는 제 수준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자신에게 감탄할 수 있는 사유가 혜경에게는 없었다. 혜경은 내가 알지 못하는 슬픔을 언급했다. 누군가로 인해 생긴 슬픔이 다른 사람과 일과 장면을 끌어오지 않고 제 몸만 밀고 오는 때가 있다. 이것은 순수한 슬픔이다. 무엇 때문에 슬프지도 않고 그저 나 혼자서 이 몸서리나는 현상에 잠겨버린다. 이때는 누군가가 나를 이해하고 말고는 하등 쓸모없다. 감정은 자연발생적인 것인데 조절해야 한다는 말을 혜경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환경은 변하지 않는데 거기에 맞춰야만 자신이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은 혜경을 더욱 불신에 빠뜨렸다. 나는 혜경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혜경처럼 행동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한 소설의 문장을 기억한다. 부끄러움이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혜경은 마지막에 가서야 수치로 가득한 나의 삶을 말할 터였다. 그전까지는 잠자코 부끄러워하며 살 수밖에 없다. 누가 그리 만들었냐고 묻는다면 나 자신이다. 나는 내가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나의 존재는 내가 그리 정한 것이다. 혜경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특별할 것 없다. 많이들 혜경처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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