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걔랑 좋았던 기억 하나만 말해봐.”
거제도로 가는 심야 고속버스 안에서 나는 친구가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친구에게 그 사람과의 이별을 전하자 그가 나에게 해준 말이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좋았던 기억. 기억. 그 사람.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환하게 웃을 때 드문드문 보이는 흰 치아와 초승달처럼 작아지던 눈. 나에게 말할 때 톡 하니 터질 것 같던 입술. 고백을 받을 때 붉게 달아오르던 뺨. 생각해보니 그 사람은 나에게 여전히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답을 하지 못하자 친구가 어깨를 툭 치면서 말해주었다.
“사람을 보내야 할 때는 제일 먼저 좋았던 기억부터 잊어야 한다더라.”
거제도는 그 사람과 처음 사랑을 시작한 곳이었다. 이유를 모르겠으나 가야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창 너머로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자리했고 터미널의 조명이 빠르게 넘어갈 때 그 사람이 하나둘 스쳐갔다. 나는 기억을 잊기 위해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를 간다는 사실을, 그것을 내가 실천하고 있다는 이 현실이 체감되지 않았다.
걔랑 좋았던 기억 하나만 말해봐. 좋았던 기억 하나. 하나. 어느 것 하나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좋았던 기억 하나만 꼽으라니까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너라는 사람이 남기고 간 좋았던 기억이 너무나도 많아서 나를 힘들게 한다. 하나라는 단어의 서늘함이 너와의 기억들을 전부 지워버리고 어느 시점의 단 하나만을 남겨버리는 듯해서, 하나라는 단어가 이렇게도 어렵고 매서운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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