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 생각해요. 보고 싶으면 그냥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게 좋겠다는 거. 아무 여과없이 내 속마음을 다 비춰내는 거. 순수한 거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참 어려워."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 남자는 술에 취해 중얼거렸다. 취기에 이끌려 나온 본심이었다. 그의 그녀로 인해 숱하게 마음 저려왔던 날들이 끝난 지금, 남자는 혼자였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이젠. 정말 어려운 건지 내가 잘못한 건지. 너무 어렵다 진짜."
아는 사람들만 찾아올 수 있는 그 술집에서 남자와 여자는 어묵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술을 홀짝였다. 남자와 여자는 직장 동료였다. 남자가 힘들거나, 여자가 힘들거나. 둘 중 한쪽이 도저히 혼자서는 못 견딜 것 같을 때 그들은 서로에게 연락해서 이따금 그곳을 찾았다. 이번엔 남자의 차례였다. 원래라면 어느 부서의 팀장이 그렇게 재수가 없다든가, 협업 부서의 누구누구 대리가 정말 짜증 난다든가, 회식이랑 야근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든가, 그런 시덥 잖다면 시덥잖은 이야기들이 서로에게 오갔다. 그런데 이번엔 남자가 실연을 당한 경우였다. 여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직장 동료인 관계에서, 이런 고민 상담이 가당키나 할 런지. 그런데 남자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술을 들이켜며 혼자서 얘기했다. 조금 귀찮긴 하지만 듣기만 하면 될 일이겠지, 여자는 국물을 떠먹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 그런데 역시나 배가 조금 고프다.
"우동, 시켜도 되죠?"
탕에 몇 개 들어있지도 않던 어묵을 혼자서 다 건져 먹은 여자가 대뜸 그렇게 남자에게 물어왔다. 난데없는 주문 발언에 잠깐 벙찐 얼굴을 하던 남자는 이윽고 웃음을 터트렸다.
"네, 뭐. 아, 튀김도 드실래요? 오늘은 제가 사는 건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사실 저녁을 못 먹어서.”
“당연히 되죠, 귀한 시간 내주셨는데. 여기요!”
전등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기분 좋게 사장을 부르는 남자의 얼굴이 발갰다. 어차피 할 일도 딱히 없었는데 얘기나 들어주고 밥 얻어먹으면 괜찮은 거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흔한 인스턴트 냄새나는 우동과, 값싼 채소와 해물을 사용한 튀김이 나왔다. 감사합니다, 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여자는 젓가락을 그릇에 가져갔다. 뜨끈한 면발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허기졌던 빈속이 채워져 가는 느낌이었다.
음식을 삼키는 여자를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는 문득 전 애인도 그렇게 잘 먹었었는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이내 말하기를 단념했다. 아직 그렇게까지 취하지는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하지 말자, 남자는 속으로 다짐했다.
장시간의 침묵이 이어지고, 여자의 젓가락질이 뜸해질 때쯤, 여자는 이제 자신이 한 마디 꺼내야 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 생각이 들자 자연스럽게 말은 나왔다. 적당히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선에서.
“여자친구 분이 속마음을 잘 안 드러내는 스타일이셨나 봐요.”
젓가락을 내려놓고 소주병을 들어 올린다. 지금 술을 따라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에 반응해 남자가 술잔을 내민다.
“음, 그런 편이었어요. 원래 연애할 때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났는데, 유독 이번은 좀 힘들더라구요.”
여자는 병을 건네받은 남자가 따른 술을 들이켰다. 속이 좀 채워지자 역시 들어줄 기분이 조금 샘솟는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통은 여자라면 남자 쪽에서 먼저 눈치 빠르게 알아주길 바랄 것이다. 남자의 연애 경력이 얼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만나봤을 듯싶은데, 이 정도면 남자가 요령이 없는 건지, 여자 복이 없는 건지 꽤 복잡하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남자 편을 들어주는 게 맞겠지.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연애하느라 참 힘드셨겠어요. 들어보니 꽤 험난했겠는데.”
“하하.”
주거니 받거니, 술이 오간다. 병들이 탁자 위로 한 줄이 되기 어려워질 때쯤, 남자와 여자는 술집을 나왔다. 새벽 3시. 다음날 고생은 확정이다. 여자의 마음속에서 낭패감이 조그맣게 피어올랐다. 택시는 잡히려나. 콜을 불러야 할 것 같은데. 남자의 꼴을 보아하니 혼자서 집을 가기에 조금 아슬아슬해 보였다.
“미안해요, 너무 늦게까지 붙잡아서. 내일 밥 살게요.”
“아뇨, 뭐 그렇게까지야.”
“갈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꾸벅, 90도 인사를 하며 남자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 모습에, 여자는 잠깐이나마 남자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술김에 헝클어트린 머리가 산발인 채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은, 역시나 조금은 애처로웠다. 하기야 차이면 누구나 힘들 텐데. 나도 그랬고. 여자는 속으로 불평했던 방금 전에 대해 약간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는 붙잡았다.
“저기, 음…… 괜찮으시다면 한번 안아드려요? 아니, 뭐 이상하게 생각하진 마시고요. 말 그대로 1초 프리허그 뭐 그런 거.”
말해놓고 보니 뜬금없구나. 여자는 지금 한 말을 후회했다. 남자가 말했다.
“아뇨…… 저…….”
고개가 푹 숙여진다. 이상한 여자로 볼 거 같은데 어쩌지. 내일은 좀 사내에서 피해 다녀야겠구나. 내가 미쳤지. 술김에 무슨 소리를 한 건지. 머리를 긁으며 여자가 입을 열려던 그 순간 남자가 읊조렸다.
“네, 저 괜찮으시면 한 번만…… 괜찮나요?”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남자의 눈은 이상하게도 멀쩡했다. 아니면 술 때문에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다. 확실한 것은, 남자는 울 것 같은 모습으로 울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다가가 두 팔로 그러안았다. 남자가 머리 하나는 더 커서 여자의 얼굴은 남자의 가슴팍에 묻혔다. 남자의 심장 소리가 잘 들리는 위치였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안지 못했다.
“괜찮아요.”
여자가 중얼거렸다. 남자는 다만 가만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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