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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tude/사랑하기에 짧은 시간

Beyond

 

 

동남아에 위치한 한 마을을 여행하던 차였다. 마을 어귀에서 누군가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참으로 낯설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향했다. 그 사람은 소녀였고, 붉은 천으로 머리를 덮은 채 소녀는 원피스 차림이었다. 한껏 차려입고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에 이 행동을 하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에게 물었다.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죠?”

 

내 말에 소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앳된 얼굴에 화장을 해서 그 모습이 조금은 귀여운 나이였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소녀가 능숙한 현지 언어로 나에게 답해왔다.

 

“네. 남편을 기다려요.”

 

“남편이요?”

 

“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당사자의 입에서 들으려니 신선한 말이었다. 결혼하기는 조금 일러 보이는 나이인 거 같은데. 마을 전통인 건가.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어려 보이는데. 벌써 결혼을 하셨나보네요. 혹시 오늘 하시는 건가?”

 

내 말에 소녀가 봉숭아처럼 톡 하니 웃음을 터트렸다.

 

“아뇨. 저희 마을에선 태어날 때부터 짝이 있어요. 운명이 점지한 인연이죠.”

 

생각보다 많이 앞서나가는 커플이었다. 내가 판단이 느린 것일까. 소녀의 웃음에 나 또한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나보다 저만큼 앞에 가 있는 이 커플에게 호기심이 갔다.

 

“남편 분이 오늘 돌아오시나 봐요. 예쁘게 차려입으셨는데 빨리 보셨으면 좋겠네요.”

 

“음. 그 사람, 떠난 지 오래됐는데 언제 오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서 그냥…….”

 

내가 또 실수했구나.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오늘 볼 수 있을 거라고 능청스럽게 굴어야 할까, 그냥 사과를 해야 할까. 혹시 죽었다는 걸 돌려 말하는 건 아닐까.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순간 소녀가 말했다.

 

“수도승이거든요, 그 사람. 지금쯤 사원에서 한창 수련 중일 거예요, 아마도.”

 

남편 분이 스님이셨구나. 그것도 짐작하지 못했다. 한발 앞인 줄 알았는데 아마 잡지 못할 수준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커플이었다. 당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인 건지 모르겠으나 뭔가 묘한 매력이 있는 소녀였다.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언제 떠나셨는데요? 이렇게 예쁜 아내를 두고 갔으면 보고 싶어서 얼른 올 텐데.”

 

내 말에 소녀는 실소했다. 몸이 들썩거려서 머리 위의 붉은 천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나풀거렸다. 붉게 칠한 입술로 소녀는 말을 했다.

 

“5년 정도 됐네요.”

 

나는 소녀의 말이 곧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보아하니 10대 후반의 나이 같은데 5년이면 남편은 그때 동자승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관계이려나. 소녀는 정신을 못 차리는 내 얼굴이 퍽이나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례지만 그 쪽 나이 대에 그 정도 시간이면 잊을 법도 할 것 같네요. 남편 분이 갈 때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도 없이 갔나요?”

 

“음, 네. 그게 그렇네요.”

 

듣고 보니 조금은 화가 났다. 아내를 두고 훌쩍 떠나버린 남편에게 화가 나는 건지, 이 어린 신부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둘 다일수도 있었다. 이 어린 사랑꾼들이 다 큰 성인인 내가 보기에 철이 없는 건지, 요령이 없는 건지. 그러다보니 내가 이 사태에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내 힘이 빠졌다. 그때 나를 들었다놨다하는 소녀가 예상을 깨는 말을 해왔다.

 

“아마 잊었겠죠, 그 사람은.”

 

“아는데 이제 그만둬야 하지 않겠어요?”

 

“그 사람한테서는 향냄새가 났어요. 향 알죠? 사원에서 피우는 그거. 그 사람을 마주칠 때면 항상 그 냄새가 퍼져 나왔거든요. 아주 은은하게.”

 

“스님이라 그렇지 않을까요?”

 

너무 당연한 말을 뜬금없이 한다. 내가 직답하자 소녀는 눈살을 접으며 웃었다. 스님이면 절에서 살 텐데 마땅히 향냄새가 몸에 배지 않을까.

 

“근데 그게 그 사람의 향이었어요. 저희 마을엔 스님이 그 사람과 주지스님뿐이었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어도 그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어요. 나만이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달까. 내가 그 사람의 운명이라고 하는데, 그게 꼭 운명 같았죠.”

 

눈, 코, 입의 바다 속에서 나만이 아는 그 향기가 내 사람을 찾게 한다. 소녀는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검게 칠한 눈썹이 떨렸다.

 

“남편은 갔는데 집에 향이 많이 남아서요. 그래서 그냥…….”

 

향기로 그 사람을 찾았는데 그것이 그 사람을 잊지 못하게 했다. 소녀의 시선은 남편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연정을 향하고 있었음을 나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나는 불현듯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아 순수한 사랑이구나. 잘 알지 못하는 쪽은 나였다. 하얀 백지 같은 그리움이었다. 무언가로 뒤덮어버리기에 순결하고도 귀한 것. 어린 소녀는 다 큰 내가 이제는 힘든 저 너머의 어딘가에 있는 존재였다. 내가 단순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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