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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tude/작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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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수요일 밤이었다. 밤이라기보다 오후와 밤 사이의 어딘가였다. 공연히 커피가 먹고 싶어져서 자주 가는 카페로 향했다. 커피와 비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지 단순히 카페인이 필요해서인지 알 수 없었으나 수요일 밤마다 카페에서 가토 오 쇼콜라 한 조각을 서비스로 내주는 것은 확실했다.

카페 문을 열기도 전에 매장 안에서 재생하는 로파이 음악이 들려왔다. 카운터에서 에스프레소 한잔과 물을 주문한 뒤 창가 쪽 빈자리가 있는지 살폈다. 오픈형 카페라 창가 쪽이 개방되어있어서 비가 내리는 길거리가 여과 없이 보였다. 자리가 있어서 앉으려던 차에 아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이네요.

G가 손을 흔들며 웃었다. 테이블 위엔 커피와 오늘의 서비스 메뉴인 가토 오 쇼콜라가 올려져 있고 그의 반대편 손에는 잡지가 들려있었다. 나는 아는 체를 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자세히 가서 보니 캐러멜마키아토였다.

―여기서 이렇게 또 보네요. 잘 지냈어요?

―나야 별 일 없이 잘 지내죠. 같이 앉을래요?

비가 내려서 나른한 오후였다. 혼자도 좋았고 싫지 않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도 괜찮은 날이었다. 나는 원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그와 합석했다. 비가 와서 카페는 한산했다. G가 앉은자리는 4인석이었는지 내가 앉아도 테이블 크기가 넓었다. 어떻게 지냈냐는 식상한 말로 대화를 시작하기 싫어서 내가 먼저 말했다.

―단 음료에 단 디저트네요. 혀가 녹아내릴 것 같은데.

―단 음식이 당겼거든요. 마침 오늘 주는 서비스가 이런 거라 딱 들어맞았기도 하고.

G는 그렇게 말하고 웃으면서 포크로 케이크를 잘랐다. 빵 위에 뿌려진 슈거파우더가 접시에 흩뿌려지면서 빵 주변에 묻었다. G는 한 입 크기로 잘라낸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서 입에 넣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보기만 해도 혀에서 들쩍지근한 맛이 느껴졌다. 내 기분과는 다르게 G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한 입이었는지 연신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전부 삼키자 그는 “개굴”하고 자그맣게 감탄사를 토해냈다.

―상당한 내공이 필요할 것 같네요. 전 단 거 잘 못 먹어서.

―꼭 그렇지도 않아요. 한번 맛 들이면 그쪽도 못 벗어날걸요.

G가 대답하는 사이 내가 주문한 커피와 디저트를 든 점원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에스프레소 한 잔과 물을 담은 컵, 그리고 G와 같은 가토 오 쇼콜라 한 조각이었다. 점원이 내 메뉴를 테이블에 내려놓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G가 말했다.

―에스프레소라니. 대단한 건 내가 아닌 것 같은데요.

―경외감의 대상이 잘못된 것 같네요. 대단하다면 제가 아니라 이걸 발명한 사람이겠죠.

나는 물을 담은 머그컵에 에스프레소를 부었다. G는 그제야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물었다.

―그럴 거면 그냥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게 낫지 않아요?

이 곳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는 3600원이고 아메리카노는 4100원인데 물은 돈을 내지 않는다. 그리고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에 물을 탄 것이다. 약간의 수고로움과 500원을 교환한 셈이었다. 500원의 가치가 나에게 커서 내린 결정은 아니었고, 단순히 이렇게 해보고 싶다는 충동적인 발상이었다. 대답하기 번거로운 일이어서 미소로 대답했다. G는 아마도 이 사실을 모를 것이다. 내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대화가 중단되었다. 읽던 잡지를 마저 보던 G가 말했다.

―비가 와서 습하네요.

의미 없는 말이었다. 무시하려다 마침 컵을 내려놓는 차에 들려온 말이라서 대답을 했다.

―그러게요.

―커피와 초콜릿이 있는, 비 내리는 밤이죠.

G는 잡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을 해왔다. 비 냄새가 좋다, 이런 날씨에는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나가는 것이 낫다, 이 카페는 커피 맛이 언제 먹어도 한결같이 좋다……. G는 문맥이 없는 말을 방향성 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나는 비가 와서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G는 잡지를 보면서 반들거리는 촉촉한 머리를 손으로 긁었고, 가로로 네모난 동공을 좌우로 굴렸다.

조용한 분위기 가운데서 나는 길거리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비는 거세지 않았지만 계속 내려서 우산을 써야만 했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우산을 쓴 사람들과 가끔 눈이 마주쳤고 곧바로 시선을 돌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전부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르는 사람을 바라보는 일은 실없고 무감각했다. 알 수 없는 관계이나, 나는 저 사람이 우산을 쓰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저 사람은 내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비가 와서 한기가 드는 몸을 뜨거운 커피로 녹였다. 커피에서 퍼져 나온 김이 빗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흘러가서 비와 섞이고 사라져 갔다. 커피에서 나온 김과 비가 섞이면 저 비는 커피 향이 나는 비가 될 것인가. 나 말고도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온 세상에 있으니 그 모든 김이 비와 섞이고 증발해서 구름이 되어 다시 비로 내리면 이 세상의 비는 모두 커피와 다름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비가 무가치한 생각을 꼬리 물게 하고 있었다.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약속이 있어서.

G의 목소리가 내 망상을 깨어주었다. 급한 모양이었는지 별 다른 인사 없이 그는 다 먹은 접시와 잔을 카운터에 반납하고 나가버렸다. G가 보던 잡지가 테이블 위에서 바람에 펄럭거렸다. 잡지를 덮자 G의 손자국 모양이 커버에 그대로 찍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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