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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tude/작은 것들

Illusion

 

 

여자는 노인이 자리한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노인임을 바로 안 것은 아니었고, 노인일지도 모르는 그는 낡은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걸치개를 쓰고 있어 얼굴은 알 수 없었다. 램프에 비친 얼굴 주름이 그가 남자이고, 노인인 것을 여자에게 알려주었다.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고쳐 닫았다. 작은 충격에 램프의 심지가 깜빡거리며 꺼질 듯이 흔들렸다. 여자가 손을 올려서 인사했고 노인이 같은 몸짓으로 답했다.

"안녕?"

여자가 눈웃음을 지었다. 노인은 웃지 않았다.

객실 문이 열리며 카트 하나가 들어섰다. 노인이 와인병을 잡고 코르크 마개를 땄다. 노인이 같이 따라온 잔 두 개에 와인을 따르고 잔을 흔들었다. 카트가 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카트는 들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모는 사람이 없어 굴러갈 때의 마찰음이 균일했다. 문은 저절로 닫혔다. 노인이 잔을 여자에게 건네었다. 여자와 노인이 서로 잔을 들어 부딪혔다. 잔들은 충돌하지 않고 통과해서 서로의 와인이 섞였다 떨어졌다. 여자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좋네."

"좋은 걸로 골라왔지"

노인의 목소리는 굵었다. 여자는 웃으면서 와인을 마셨다. 웃으면서 마셨으므로 이후에 흘러나오는 웃음이 취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와인 한 잔을 모두 마시고 여자는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시야에 밀려들어오는 풍경은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차 있었다. 보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자는 커튼을 치고 시선을 노인에게 돌렸다. 노인의 눈은 보이지 않았고 다만 주름진 입가로 와인잔을 가져가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가 물었다.

"페르세포네에게 석류를 먹인 건가. 다 먹었는데 뭐가 더 없네."

노인이 고개를 들어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꼬리가 떨렸다. 여자의 어깨는 둥글었고 중심으로 집중되려는 듯 좁았다. 노인이 말했다.

"한잔 더 하지."

여자가 실소했다. 여자는 잔을 내밀었다. 와인은 붉었고 잔에 담길 때 유리를 깨고 흘러나올 듯이 강렬했다. 여자는 붉은 입술로 와인을 머금었다. 여자가 잔을 잘못 가져다대어서 와인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자가 소매로 입을 훔쳤다.

"손수건이 없어서 미안하군."

"바라지도 않아."

여자는 계속해서 웃었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둘둘 말았고 다리를 꼬았다가 풀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객실로 돌아다녔다. 여자의 행동은 자유로웠고 노인은 말리지 않았다. 한동안 자리에 없던 여자가 노인이 있는 객실로 돌아와 서 다시 앉았다.

"객실에 사람이 없네. 이래서 장사가 되나 몰라."

"전세 내서 그래. 다음엔 이런 거 없어."

"위트 있는 분이었네. 가는 길에 즐거워서 좋아."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발을 테이블 다리에 부딪히며 침묵했다. 여자가 발을 부딪힐 때마다 테이블 위의 와인잔이 달그락거렸으나 떨어지진 않았다. 열차가 선회했는지 여자의 몸이 문 쪽으로 쏠렸다. 노인이 차창의 커튼을 걷었다. 노인의 행동에 여자가 반응해 창 밖 풍경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여자가 고개를 아플 정도로 돌리자 빛이 보였다. 둥글게 꺾인 열차의 앞은 아득한 빛으로 소멸하는 중이었다. 열차는 중도에 서지 않고 달려서 간다는 것에 대해 무지하게끔 만들었다. 열차가 설 때가 되었음을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여자는 느낌으로 알았다.

"산다는 건 환상인가 봐."

"어떤 면에서 그런 거지?"

노인은 옅은 포도향이 나는 여자의 입에서 팔과 손, 다리로 시선을 옮겨갔다. 여자의 몸은 노인이 입고 있는 옷만큼이나 오래되었고 닳았다. 닿은 손길이 많아서 더 이상 쓰기에 어렵다, 그렇게 보였다. 여자의 갈색 머리카락이 노인의 옷에 닿아서 엉켜 들었다.

"직업병이야."

"뭐가?"

"웃는 거."

"내가 물어보았던가?"

"당신이 물어봐주기까지 기다리기 힘들어서."

여자가 웃었다. 노인은 잔을 내려놓았다.



멀리서 열차 화통 소리가 들려왔다. 종착역인 것인가, 별안간 여자가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갑작스럽게 쏟아졌다. 웃음과 울음의 경계는 얕았다. 여자의 울음은 옅어서 가깝게 울렸고 진해서 멀리 퍼졌다. 노인은 다만 여자를 쳐다보았다. 우는 것은 이 여자의 직업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여자는 바닥에 엎드려서 서투르게 울었다. 여자의 웃음은 울음이었던 모양이었다. 노인은 여자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길었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풍경이 객실에서 마차 안으로 바뀌었다. 창문 밖을 화륜(火輪) 두 쌍이 메웠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말 네 필이 투레질하며 검은 물 위를 내달렸다. 노인의 형상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너는 연옥(煉獄)행이다."

여자는 웃었다. 웃는 것이 직업인 여자였다. 노인이었던 것이 낫을 들어 여성을 베었다. 비명 없이 베인 감각에는 물질의 느낌이 없었다. 잘린 혼이 강에 소리 없이 녹아들었다. 말이 길게 울음을 내빼었다. 마차 문이 닫히고 화륜이 세차게 돌았다.



남자는 노인이 자리한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노인임을 바로 안 것은 아니었고, 노인일지도 모르는 그는 낡은 로브를 입고 있었는데 걸치개를 쓰고 있어 얼굴은 알 수 없었다. 램프에 비친 얼굴 주름이 그녀가 여자이고, 노인인 것을 남자에게 알려주었다.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고쳐 닫았다. 작은 충격에 램프의 심지가 깜빡거리며 꺼질 듯이 흔들렸다. 남자가 몸을 굽히며 노인에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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