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사람은 고양이를 좋아했다. 고양이만 보면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던 사람이었다. 굳이 고양이 카페나 동물병원을 가지 않아도 길에 돌아다니는 고양이만 봐도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 사람의 휴대폰에는 고양이 사진들이 가득했고 가끔 나에게 문자로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는 말과 함께 새끼 고양이 영상 링크를 보내곤 했다.
일본에 갈 일이 있어서 며칠 묵고 돌아오는 길에 마네키네코 하나를 사서 그 사람에게 선물해주었다. 도자기로 된 제품이었는데 받자마자 그 사람은 뛸 듯이 기뻐했다. 너무 귀엽다고. 이런 거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 그 사람은 물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좋아할 것 같아서 샀다고 했다. 기념품을 만지작거리면서 그 사람은 고양이 입양을 알아보고 있다는 말을 해왔다. 이제 어느 정도 공부를 해서 기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키울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나는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어서 키우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 혼자 살기도 버거운데 동물까지 감당하기는 더 어렵다는 말을 덧붙여서. 그 사람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래도 저는 아이들을 보면 힘이 나서요. 요새 애완동물이 아니라 반려동물이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아이는 고양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생소한 표현이었다. 그 사람은 입양받게 되면 사진을 찍어 보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 하고 헤어졌다. 몇 주 뒤 받은 문자 메시지엔 흔히 볼 수 있는 갈색 얼룩 털 고양이 사진이 첨부되어있었다. 그 뒤로 그 사람은 간간히 제 고양이 사진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어느새 내 메시지함에는 고양이 사진이 가득 들어찼는데 익숙해질 때쯤 그 사람의 연락이 끊겼다. 조금 더 지나자 내가 예전에 주었던 마네키네코는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그걸 보면 그 아이가 생각나서 너무 힘들다고, 그 사람은 말했다. 나는 어림짐작했다.
"요새 사람 때문에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러면 안 되지만 그래서 데려온 건데. 참 빨리 떠나네요, 사람보다."
나는 그 사람이 왜 몇 년 간 바라보기만 하다가 이제야 갑자기 동물을 길렀는지 이해했다. 그 사람은 말을 아꼈다. 나는 구태여 더 물어보지 않았다. 동물을 반려로 두지 않은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슬픔이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 보냈던 사진들을 지워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돌아서서 가는 그 사람을 보며 나는 그 사람이 사람들로부터 멀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어려운 일일 것이다.